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엄니1

들국화 들국화 2009. 1. 5. 17:58

망각을 일깨우며



글: 박종규, 낭독: 이남희, 시낭송: 고은아


어머니…….


그래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다.


내 살아오는 동안 가장 슬펐던 때는 어머니를 영영 떠나보내는 순간이었다.


삼일 밤낮을 옥상에 올라가서 혼자 울었다.


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고, 나중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.


사람은 망각 속에서 살아가는가.


그 망각이라는 것은 귀했던 일도, 좋았던 추억도, 슬펐던 일, 사랑했던 모든


것 까지도 사람이 세월의 둔덕을 넘을 때 모두 함께 남겨두고 넘어가게 하는


것인가.


어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. 새삼 그 인자했던 얼굴을 떠올린다.


누구에게나 어머니는 정이 우러나는 이미지로 남아있겠지만 내 어머니는 참


넉넉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. 친구들이 자기들 엄마보다도 내 어머니를


더 좋아했을 정도로 평생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셨던 어머니셨으니.


괴팍한 성품의 아버지를 만나서 갖은 고생을 다 했으나 항상 순종하는 아내로서


자리를 지켜낸 분이었다. 아버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을 때는 막노동까지


하셨다. 나의 슬픔은 그런 내 어머니와 했던 약속으로 인하여 더욱 절절했다.


나는 어머니께 약속을 한 가지 했었다.


그 약속은 너무나 지당하게도 얼른 커서 성공하여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겠다는


것이었다. 나는 기특하게도 고학을 하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,


내 약속의 날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듯 했다.


장교복을 입고 입영할 때,


나는 어머니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.


전역을 수개월 앞둔 어느 날, 집에서 전보가 왔다.


이모님이 돌아가셨다는. 그 이모는 슬픈 사연을 가진 분이었다.


육이오 동란 중, 이모의 오빠가 휴가를 왔는데 전시였기 때문에 총기를 휴대하고


있었다. 이 총기가 오발사고를 일으켜 이모의 정강이를 관통한 것이다.


집안에 하나밖에 없던 오빠는 전란 중 전사했고,


이모는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, 이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결혼이


늦어지더니 결국은 어느 집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다.


당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후처노릇을 끝낼 수밖에 없었고, 이모는 그 집에서


나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외할머니까지 돌보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


중이었다. 어머니는 늘 당신의 동생 걱정을 안고 사셨다.


물론 내게도 참 좋은 분이어서 고학하는 내게 위로를 많이 해 주셨다.


부대로 날라 온 전보에는 사인死因이 나와 있지 않았다.


전화도 귀했던 시절이라 휴가를 내어 집에 가서야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.


저녁녘에 도착해 보니 집은 텅 비어있었다.


다들 인천의 이모님 빈소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군화 끈을 풀다말고


인천으로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구두끈을 조였다.


바로 그때, 앰뷸런스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더니 대문 앞에서 멈추고 있었다.


난데없이 우리 집에 웬 앰뷸런스일까 머리회전이 안 되었다.


그러나 곧바로 대문이 열리고 남동생이 들어서면서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.


“형, 어머니 돌아가셨어!”


말도 안 나왔다. 그럼 이모가 아니고 어머니였구나, 내가 충격 받을까 봐 이모라고


한 게로구나 싶었다. 앰뷸런스에서 흰 천을 씌운 들것이 내려지고 있었다.


나는 달려 나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.


놀랍게도 아직 따스했다.


“아직 살아계시잖아?”


“운명 하셨어. 한 이십 분 됐어, 형.”


“뭐라고? 그럼 이모는?”


“이모님도......”


이모는 교통사고를 당하신 거였다.


평소에 이모 걱정을 많이 하시는 어머니에게 이모의 사고를 알리면 충격을 받으실


것이 뻔 해 동생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.


마침 외할머니는 많이 늙으셔서 거동까지 불편하셨기 때문에 충격이 훨씬 덜할 수


있었다.


동생과 함께 인천의 이모 빈소에 간 어머니는 이모의 영정사진 밑에서 어머니를


슬피 부르셨다고 했다. 옆에 있던 다른 친척이 외할머니가 아니고 이모라고 귀띔을


한 순간 영정사진을 다시 올려다보던 어머니는 숨이 가빠지더니 그 자리에서


쓰러지셨다고 한다.


서둘러 응급실로 갔으나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시든지 하라며 가망이 없다는


진단이 내려졌고, 응급차로 서울 큰 병원으로 가던 고속도로 상에서 끝내 숨을


거둔 것이었다.


줄초상이었다. 슬픔은 배가 되었고, 불쌍한 이모님께는 가보지도 못하고 귀대를


해야 했다. 그 때 나는 사람의 운명, 팔자 같은 것을 생각했다.


힘든 세상만 살고 이제 자식이 좀 편하게 모실만 하니 세상을 뜨신 어머니.


세상에는 원인만 있고 결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.


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선善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.


어머니는 내가 재수하던 시절, 딱 1년간 교회에 다녔다.


오직 자식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였다.


사느라고 하나님을 영접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. 장례식 날 목사에게 물었다.


우리 어머니는 정말 착한 분이셨고, 남에게 베풀기 만 하던 사람인데 구원을 받아


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. 목사는 고개를 흔들었다. 섭섭했다. 나는 기독교와 유교,


불교가 혼재된 장례를 치렀다. 어머니에게 좋은 것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.


그리고 내 성장과정에서 나를 지켜주었던 기독교를 떠나기로 했다. 어머니가 구원을


못 받아 지옥에 가신다면 나도 그리 가리라 생각했다.


지금 내 아내가 그 시절의 어머니역할을 하고 있다. 아들은 나보다는 아내를 더


따르는 편이다. 아내의 어딘가에 어머니의 좋은 성품이 있어서일 것이다. 하지만


아내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갈 것이고, 아들은 잠시 슬픔에 겨울 것이다.


그리고 아들의 아들이 성장한 뒤 아들의 기억 속에서 아내는 또 얼마나 남아질 수


있을까.


망각은 슬픔을 잊게 하고 과거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. 지금의 모든


일들도 결국은 망각의 광주리에 담겨지리라.


* 아래의 시는 내 어머니에게 드리는 사모곡이다.


그리하리라


하늘바다


그 넓은 가슴에 빠져


섧도록 소리치고 싶다


쩌엉 쩌엉 하늘 가르는


외침하나로


그대 곁에 가고 싶노라고


그대 깊음 깊고 깊어


태산아래 골짜기라도


하늘 가득 담긴 그 담소에 빠져


나 영영 수장되고 말지라도


그대 사랑 거기 있었음에


처음부터 수평으로 하나였던 당신과 나


다시는, 다시는 바람이 나누지 못하도록


두 손 길게 늘려 동여매리라


눈빛 눈빛으로 일군 불꽃 타올라


하늘 바다 다 말리도록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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